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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 탓입니다.
  • 편집국
  • 등록 2024-05-20 11: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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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들은 일하는 시간과 환경이 자주 바뀐다.

일하고 쉬는 시간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특히 하루 정해진 시간에 따라 근무를 해야 하는 현업은 더 그렇다.

보통 주말이나 휴일에는 기본 방송 외에 긴급 상황도 생기기 때문이다.

중요한 뉴스가 가끔 나온다.


그 시간을 지정하는 것이 근무표다.

아나운서는 기본적인 뉴스와 행사 진행, 방송실 대기까지 모두 이 근무표에 따른다.

일의 흐름을 아는 선배가 짜는 이유이다.


입사하고 2년이 지난 때부터 이 일을 했다.

잡무까지 다 하는 임무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함께 교통방송이라는 아침 방송이 따라다니니

긴장하는 짐은 두 배가 됐다.


긴장의 연속인 아나운서 업무도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 리듬으로 자리 잡았다.

날마다 새벽에 나오니 힘든 일이 즐거움으로 변한 것도 몇 년 뒤의 일이다.


사실 아나운서 잡무도 쉬운 것은 아니다.

상황이 변할 때마다 모두 고치고 확인해야 한다.

휴가가 시작되면 일주일에도 서너 번 정정할 때도 있다.


세월이 흘러 1997년 말

나라의 틀까지 흔들었던 경제위기가 방송사에도 몰아쳤다.

그동안 함께 일했던 아나운서가 하나 둘 떠났다.

직장, 특히 사무실 분위기는 한 마디로 적막함으로 가득했다.

미소, 인사, 격려 등은 아예 없었다.

서로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근무도 수시로 바뀌는 상황이 됐다.

그렇게 변하는 물결 속에서 다른 방송을 여러 개 맡게 돼

나의 잡무도 한 후배에게 넘어갔다.


근무표 작성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보다는 

계속 확인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와 닿았다.


아나운서 근무도 순서와 시간 배분 기준이 있는 법이어서

바뀔 때는 충분한 예고와 확인을 해야 한다.

그 일을 후배가 하게 됐으니 좀 뒤에 있어도 된 상황이다.


어수선한 12월 말, 일이 터졌다.

또 바뀐 근무표를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불찰이었다.

바뀐 지 하루 만에 다시 변했는데 그 표를 받지 못했다.

결재에 관여하지 않았고 통보도 받지 못했으니 내 업무수첩에는 전 근무표가 붙어 있었다.


12월 31일 근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새해 다짐을 하고 꿈나라에 갔다.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다, 모처럼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가!



그런데 아침 7시 2분,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자 "여보세요?, 오늘 근무가 누구요?"

숙직 엔지니어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직감했다. 사고였다.

바로 끊고, 입은 옷 위에 외투를 걸치고 튀어나왔다.

겨울이지만 차 시동을 하자마자 비상등을 켜고 회사로 달린다.

오늘만은 푸른신호등 진행자가 아니었다.

앞만 보고 달렸다.


사진=픽스베이

차를 현관 앞에 세우고 뛰어 들어간 방송실!

4분 만에 들어왔건만 이미 뉴스가 끝날 시간이다.

하도 뛰어서 맥이 풀려 마이크 앞에 앉은 채 넋을 잃고 눈을 감았다.

평일 뉴스 같으면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새해 연휴 뉴스 편성이어서 시간이 짧았다.

20분 뉴스가 10분으로 단축되었다.


새해 첫날부터 방송사고가 났다.

한숨 쉬며 확인해 보니 근무자가 바로 나란다.

근무표가 또 바뀌었다는 얘기다.


13년의 방송경력에 빨간 불이었다.

근무하는 종일 찹찹했다.


1주일 뒤에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그동안 내가 근무한 거를 아시는 위원들이 질문을 한다.

“바뀐 근무표를 제대로 받았나요? 작성과 확인은 누가 했나요? 연락은 몇 시에 받았나요?

좀 일찍 전화를 받았으면 막을 수 있었죠? 평소에 이런 사고를 낸 적이 있나요?”  

나를 배려한 질문들이었다. 

어찌, 후배에게, 동료에게 넘기겠는가!

다시 묻는 말에 “다 제 책임입니다”

“정말 할 말이 없습니까? 이의 없는 거죠” 얼굴을 보며 건넨 또 다른 묻는 말에도 

“ 네 없습니다.”

미소로 답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감봉 2개월’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의 신청하라는 조언도 멀리했다.

그래도 게시판에 차디찬 공고는 붙지 않았다.

그것도 회사의 큰 배려였다.


그동안 수많은 방송사고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막았건만

정월 초하루의 내 사고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다시 아나운서 잡무를 가져왔다.

후배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직원들이 미소를 건넨다.

책상 위에는 뜨거운 녹차 한 잔이 놓여 있다.


주말과 휴일에는 반드시 직접 확인하고 퇴근한다.

회사에서 못했으면 집에서 꼭 확인한다.


이러다가 편집증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할 수 없다.

왜?, 피 말리는 방송! 그것이 나의 천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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