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들은 일하는 시간과 환경이 자주 바뀐다.
일하고 쉬는 시간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특히 하루 정해진 시간에 따라 근무를 해야 하는 현업은 더 그렇다.
보통 주말이나 휴일에는 기본 방송 외에 긴급 상황도 생기기 때문이다.
중요한 뉴스가 가끔 나온다.
그 시간을 지정하는 것이 근무표다.
아나운서는 기본적인 뉴스와 행사 진행, 방송실 대기까지 모두 이 근무표에 따른다.
일의 흐름을 아는 선배가 짜는 이유이다.
입사하고 2년이 지난 때부터 이 일을 했다.
잡무까지 다 하는 임무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함께 교통방송이라는 아침 방송이 따라다니니
긴장하는 짐은 두 배가 됐다.
긴장의 연속인 아나운서 업무도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 리듬으로 자리 잡았다.
날마다 새벽에 나오니 힘든 일이 즐거움으로 변한 것도 몇 년 뒤의 일이다.
사실 아나운서 잡무도 쉬운 것은 아니다.
상황이 변할 때마다 모두 고치고 확인해야 한다.
휴가가 시작되면 일주일에도 서너 번 정정할 때도 있다.
세월이 흘러 1997년 말
나라의 틀까지 흔들었던 경제위기가 방송사에도 몰아쳤다.
그동안 함께 일했던 아나운서가 하나 둘 떠났다.
직장, 특히 사무실 분위기는 한 마디로 적막함으로 가득했다.
미소, 인사, 격려 등은 아예 없었다.
서로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근무도 수시로 바뀌는 상황이 됐다.
그렇게 변하는 물결 속에서 다른 방송을 여러 개 맡게 돼
나의 잡무도 한 후배에게 넘어갔다.
근무표 작성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보다는
계속 확인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와 닿았다.
아나운서 근무도 순서와 시간 배분 기준이 있는 법이어서
바뀔 때는 충분한 예고와 확인을 해야 한다.
그 일을 후배가 하게 됐으니 좀 뒤에 있어도 된 상황이다.
어수선한 12월 말, 일이 터졌다.
또 바뀐 근무표를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불찰이었다.
바뀐 지 하루 만에 다시 변했는데 그 표를 받지 못했다.
결재에 관여하지 않았고 통보도 받지 못했으니 내 업무수첩에는 전 근무표가 붙어 있었다.
12월 31일 근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새해 다짐을 하고 꿈나라에 갔다.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다, 모처럼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가!
그런데 아침 7시 2분,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자 "여보세요?, 오늘 근무가 누구요?"
숙직 엔지니어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직감했다. 사고였다.
바로 끊고, 입은 옷 위에 외투를 걸치고 튀어나왔다.
겨울이지만 차 시동을 하자마자 비상등을 켜고 회사로 달린다.
오늘만은 푸른신호등 진행자가 아니었다.
앞만 보고 달렸다.
차를 현관 앞에 세우고 뛰어 들어간 방송실!
4분 만에 들어왔건만 이미 뉴스가 끝날 시간이다.
하도 뛰어서 맥이 풀려 마이크 앞에 앉은 채 넋을 잃고 눈을 감았다.
평일 뉴스 같으면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새해 연휴 뉴스 편성이어서 시간이 짧았다.
20분 뉴스가 10분으로 단축되었다.
새해 첫날부터 방송사고가 났다.
한숨 쉬며 확인해 보니 근무자가 바로 나란다.
근무표가 또 바뀌었다는 얘기다.
13년의 방송경력에 빨간 불이었다.
근무하는 종일 찹찹했다.
1주일 뒤에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그동안 내가 근무한 거를 아시는 위원들이 질문을 한다.
“바뀐 근무표를 제대로 받았나요? 작성과 확인은 누가 했나요? 연락은 몇 시에 받았나요?
좀 일찍 전화를 받았으면 막을 수 있었죠? 평소에 이런 사고를 낸 적이 있나요?”
나를 배려한 질문들이었다.
어찌, 후배에게, 동료에게 넘기겠는가!
다시 묻는 말에 “다 제 책임입니다”
“정말 할 말이 없습니까? 이의 없는 거죠” 얼굴을 보며 건넨 또 다른 묻는 말에도
“ 네 없습니다.”
미소로 답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감봉 2개월’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의 신청하라는 조언도 멀리했다.
그래도 게시판에 차디찬 공고는 붙지 않았다.
그것도 회사의 큰 배려였다.
그동안 수많은 방송사고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막았건만
정월 초하루의 내 사고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다시 아나운서 잡무를 가져왔다.
후배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직원들이 미소를 건넨다.
책상 위에는 뜨거운 녹차 한 잔이 놓여 있다.
주말과 휴일에는 반드시 직접 확인하고 퇴근한다.
회사에서 못했으면 집에서 꼭 확인한다.
이러다가 편집증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할 수 없다.
왜?, 피 말리는 방송! 그것이 나의 천직이니까!